‘질병 유전자’ 있어도 10명 중 9명 멀쩡했다…DNA는 운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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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언스웨이브

‘질병 유전자’를 물려받으면 결국 병에 걸린다는 통념이 흔들리고 있다. 실제 대규모 유전체 분석에서는 심각한 유전질환과 관련된 변이를 가진 사람 상당수가 평생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거나 훨씬 가벼운 증상만 나타내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과학자들은 이제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뿐 아니라 ‘무엇이 병을 막아주는가’를 찾기 시작했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질병 유전자가 있어도 10명 중 9명은 눈이 멀쩡했다

미국 매스 제너럴 브리검 병원의 안과 유전학자 에릭 피어스와 엘리자베스 로신은 유전성 망막질환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유전자 변이를 조사하다 예상 밖의 결과를 발견했다. 질병 관련 변이를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눈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유전학에서는 낭포성 섬유증, 척수성 근위축증,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유전성 망막질환처럼 하나의 유전자가 큰 영향을 미치는 질환을 비교적 단순하게 이해했다. 특정한 위험 변이를 물려받으면 언젠가는 해당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초기 유전학 연구 방법 자체의 한계가 숨어 있었다. 1970~1980년대에는 유전체 분석이 매우 비싸고 어려웠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미 심각한 유전질환 환자가 여러 명 발생한 가족부터 조사했다.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자 변이를 찾아 질병의 원인을 거꾸로 추적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법으로 낭포성 섬유증, 헌팅턴병, 망막색소변성증 등 수많은 질환의 원인을 밝혀냈다. 하지만 애초에 ‘가장 심하게 아픈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해당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연구에서 빠지기 쉬웠다. 결과적으로 특정 유전자의 위험성이 실제보다 크게 평가됐을 가능성이 생겼다.

상황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 이후 크게 달라졌다. 유전체 분석 비용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수십만 명의 환자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의 DNA까지 한꺼번에 비교할 수 있게 됐다. 2014년 약 6만 명의 유전체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건강한 사람들이 질병 유전자 변이를 상당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피어스와 로신은 여기서 질문의 방향을 뒤집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이 위험 유전자를 가진 사람 가운데 실제로 몇 명이나 병에 걸렸는가’를 물었다.

두 사람은 수십만 명의 유전정보와 의료기록을 보관한 대규모 자료를 분석했다. 유전성 망막질환과 관련된 변이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실제 눈 검사 자료와 비교했다. 특히 40세 이상 성인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유전성 망막질환 환자가 법적 실명에 이르는 평균 연령이 약 40세이기 때문에 이 정도 나이라면 질환이 발병했을 경우 이미 징후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처음에는 질병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약 90%가 질환을 앓고 10% 정도만 건강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결과는 거의 정반대였다.

잠재적으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 변이를 가진 사람 가운데 실제 눈 질환이 확인된 비율은 약 9%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같은 위험 변이를 가진 10명 가운데 약 9명은 뚜렷한 망막질환이 없었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보다 ‘병을 막는 유전자’를 찾는다

이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기존 유전학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는다. 똑같은 위험 유전자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고 다른 사람은 건강하다면, 건강한 사람의 몸에는 질병의 영향을 막아주는 또 다른 장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과거에 질병 원인으로 분류한 유전자 변이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는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과거의 유전체 자료를 다시 검토하면서 질병 유전자 목록에서 일부 유전자를 제외하거나 위험도를 낮춰 평가하고 있다.

겉으로 건강해 보이는 사람도 실제로는 완전히 정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유전성 심근병증과 관련된 위험 변이를 가진 사람들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심장질환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도 고혈압이나 심부전 치료제를 복용할 가능성이 더 높거나, 정밀 영상검사에서 가벼운 심장 구조 이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즉 유전질환은 ‘건강’과 ‘질병’이라는 두 상태로 정확하게 갈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매우 가벼운 이상과 심각한 질환까지 하나의 연속선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더 흥미로운 가능성은 인간의 약 2만 개 유전자 가운데 다른 유전자들이 위험 변이의 영향을 상쇄하는 경우다. 인간의 몸은 오랜 진화를 거치며 여러 겹의 생물학적 안전장치를 갖췄다. 한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유전자 하나 또는 여러 유전자가 함께 작동해 그 영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보호 유전자’를 찾아내면 새로운 치료법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실제 의학에서는 선천적인 유전자 변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은 사람들을 연구해 새로운 콜레스테롤 치료법을 개발한 사례가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서 발견된 자연적인 보호 장치를 다른 환자의 몸에서 약물이나 유전자 치료로 재현하는 방식이다.

같은 전략을 유전성 실명이나 낭포성 섬유증,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같은 질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위험 유전자를 가지고도 건강한 사람들의 DNA를 비교해 질병을 막아주는 변이를 찾아낸다면, 이를 모방하는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스와 로신도 이제 질병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건강한 사람과 가족의 유전체를 더 깊이 분석해 어떤 유전적 차이가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찾을 계획이다.

DNA는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한 운명표가 아닐 수 있다. 앞으로 유전학의 중요한 질문은 ‘어떤 유전자가 사람을 아프게 하는가’를 넘어 ‘같은 위험 유전자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왜 평생 건강한가’로 이동하고 있다. 그 답을 찾아낸다면 인간의 DNA 속에서 실명과 신경퇴행성 질환을 비롯한 여러 유전질환을 막을 새로운 치료법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성치훈 기자 hello@sciencewave.kr

출처: National Geographic, “Why Some People Are Born With Devastating Gene Mutations—And Never Get S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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