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고요해지는 아침, 사슴 한 마리가 풀을 뜯으며 쉬고 있는 순간. 그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작은 박새 한 마리가숲 가장자리가 잠잠해지는 이른 아침. 사슴 한 마리가 반추동물 특유의 느린 호흡으로 풀을 뜯으며 휴식하고 있다. 그 뒤편, 몸집 작은 박새 한 마리가 날개를 낮게 접은 채 접근한다. 짧은 정지 동작 후, 부리로 사슴의 목덜미를 강하게 쪼아 단숨에 털을 뽑아낸 박새는 즉시 날아오른다. 사슴은 놀란 기색을 보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한다. 이 행동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장난이 아니다. 보금자리를 짓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동물의 털을 ‘훔쳐’ 집 짓는 행동을 가리키는 학술 용어 ‘클레프토트리키(kleptotrichy)’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klepto(훔치다)’와 ‘trich(털)’을 합친 표현이다. 현재까지 공식 한국어 학술명은 정해지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일부 작은 조류가 동물의 털을 보금자리 재료로 사용한다는 관찰은 있었지만, 털갈이 시기 자연적으로 떨어진 털을 모아가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살아 있는 동물의 몸에서 직접 털을 뽑아가는 사례가 명확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털을 채취하는 이유
2021년 학술지 Ecology에 발표된 미국 Southern Plains Land Trust의 H. S. 폴록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박새과 조류는 사슴, 노루, 여우, 너구리, 개, 소 등 다양한 포유류로 접근해 털을 채취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영상 분석 결과, 박새는 포유동물이 휴식하거나 잠든 틈을 이용해 신속하게 털을 뽑아 날아오르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보였다.
조류에게 동물 털은 가볍고 단열성이 높아 보금자리의 보온 성능을 크게 향상한다. 특히 온대 기후에서 알과 새끼의 체온 유지 여부는 번식 성공률을 직접 좌우한다. 연구팀은 포유류 체취가 둥지 위치를 포식자가 탐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위장 효과를 제공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부상 위험이 상당함에도 행동이 유지되는 이유는 보온 실패로 인한 번식 손실이 더 큰 생존 비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해외 보고는 증가… 한국은 연구 공백
클레프토트리키는 박새과 외에도 일부 참새목 조류, 까마귀류에서 확인되고 있다. 도심 환경에서는 사람 머리카락이나 섬유 조각, 신발 끈을 채취하는 변형 사례도 보고되었다. 반면 한국의 박새,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등 박새과 종에서 동일 행동은 아직 공식 보고가 없다. 조류 생태 연구자들은 국내에서도 사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며 장기 관찰 및 영상 기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참고 문헌: H.S. Pollock et al. What the pluck? Theft of mammal hair by birds is an overlooked but common behavior with fitness implications. Ecology. Vol. 102. July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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