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쥐 피부 침투, 저온성 병원성 곰팡이
- 인간 활동 통한 포자 전파, 북미 유입 단일 사건
- 박쥐 600만 마리 폐사, 장비 세척·생물안전 관리 필수
2006년 겨울, 미국 뉴욕주의 한 동굴에서 정체불명의 박쥐 집단 폐사가 발생했다. 동면 중인 박쥐들은 코와 얼굴에 하얀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죽어 있었고, 폐사 원인은 처음엔 오리무중이었다. 이후 밝혀진 범인은 유럽에서 온 치명적 병원성 곰팡이 Pseudogymnoascus destructans(이하 P. destructans)였다. 박쥐 피부에 침투하는 이 곰팡이는 동면을 방해하고 박쥐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질병은 곧 ‘백색코병(white-nose disease)’으로 명명됐고, 북미 전역으로 퍼졌다. 치사율은 90% 이상에 달했으며, 지금까지 북미에서 600만 마리 이상의 박쥐가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포유류 감염병으로 인한 집단 폐사 중 기록상 최대 피해 사례다.
그러나 최근 국제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는 사태가 더 심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백색코병을 일으키는 병원성 곰팡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한 종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북미에는 현재 한 종만 퍼져 있지만, 두 번째 종이 유입될 경우 박쥐 개체군은 다시 치명적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곰팡이 두 종, 북미 박쥐 생태계의 새로운 위협
그동안 백색코병은 P. destructans 단일 종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유럽, 아시아, 북미 27개국에서 수집한 5,479개 곰팡이 샘플을 분석해, 백색코병을 유발할 수 있는 두 번째 곰팡이 종이 존재함을 확인했다.
이 저온성 병원성 곰팡이는 박쥐의 피부에 침투해 조직을 손상시키고, 체내 수분과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시킨다. 박쥐는 동면 중 체온이 떨어진 상태에서 감염되며, 반복적으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고갈돼 폐사에 이르게 된다.
이번에 확인된 두 번째 종은 P. destructans와는 다른 박쥐 종에 특화된 병원성을 갖고 있다. 현재까지 북미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입될 경우 기존 감염에서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던 박쥐 종까지 위험에 놓이게 된다.
문제는 이미 첫 번째 곰팡이에 대한 자연 회복이 일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미 박쥐 개체군 중 일부 종들은 면역 반응을 강화하거나 회복 징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병원성 곰팡이가 퍼질 경우, 이러한 회복 흐름이 무너질 수 있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니콜라 피셔 박사는 “우리는 적을 하나로 알고 있었지만, 이제 두 배로 복잡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두 종의 곰팡이 간의 진화적 관계와 박쥐 숙주와의 상호작용 차이까지 규명 중이다.
감염의 발원지는 우크라이나 동굴
이번 연구는 백색코병의 북미 유입 경로에 대한 논란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대규모 유전자 분석 결과, 북미에서 처음으로 백색코병이 확인된 뉴욕주 동굴 감염은 우크라이나 포딜리야(Podillia) 지역 대형 석회암 동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지역은 세계 최대급 동굴 시스템 중 하나로, 구소련 붕괴 이후 북미 동굴탐험가들이 자주 찾는 탐사지였다. 연구진은 이 지역에서 오염된 장비를 통해 곰팡이 포자가 미국으로 옮겨졌고, 뉴욕주 동굴에서 첫 감염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곰팡이의 북미 유입은 단 한 차례의 사건으로 이뤄졌으며, 이후 북미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이번 결과는 인간 활동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단 한 번의 곰팡이 이동이 대륙 전체 박쥐 개체군에 재앙적 영향을 미친 사례이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앵 퓌슈마이유 박사는 “2십여 년간 논란이 이어졌던 북미 백색코병의 기원을 처음으로 명확히 규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우선 과제는 두 번째 종의 북미 유입 차단
박쥐는 북미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곤충 개체수를 조절하고, 일부 종은 식물 수분에도 기여한다. 박쥐 개체군 감소는 농업 피해 증가, 생태계 불균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가장 시급한 대응은 두 번째 병원성 곰팡이 종의 북미 유입을 철저히 막는 것이다. 연구진은 동굴 탐사 장비의 철저한 세척과 생물안전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연구에 따르면 탐사 장비에서 곰팡이 포자가 발견되는 비율은 철저한 세척을 거치면 현저히 감소한다. 철저한 예방 조치는 박쥐 보존과 추가 감염을 막는 핵심 수단이다.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P. destructans 감염 사례가 공식 보고된 바는 없다. 그러나 동굴 탐사와 외국 탐험가 방문이 활발한 국내 상황에서도 예방 조치는 필요하다. 박쥐는 국내 생태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국립생태원과 국립공원공단 등이 박쥐 보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백색코병과 같은 병원성 곰팡이에 대한 체계적 관리 지침과 교육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연구진은 “국제적 이동이 활발한 만큼 동굴 탐사 장비의 세척과 생물안전 관리가 국경을 넘어 공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연구는 36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와 박쥐 전문가들의 협력을 통해 완성됐다. 북반구 전역에서 방대한 샘플을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과학(citizen science) 네트워크 덕분이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
참고 논문: Nicola M. Fischer et al, Two distinct host-specialized fungal species cause white-nose disease in bats, Nature (2025). DOI: 10.1038/s41586-025-09060-5
정보: Nature / Universität Greifsw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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