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흔히 겪는 부작용 중 하나는 장 점막의 손상이다. 설사, 복통, 흡수 장애 등은 치료 이후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손상된 장세포가 줄기세포처럼 다시 태어나 스스로를 복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손상된 장이 스스로를 되살리는 숨겨진 회복력의 가능성을 발견한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콜로라도대학교 암센터 연구진은 손상된 장세포가 줄기세포 상태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자 스위치’를 규명했다. 이 스위치는 세포가 재생 모드로 전환되는 시점을 조절하며, 대장암과 염증성 장질환, 항암치료 후 장 점막 손상 등에 새로운 치료 접근법을 제시할 수 있는 열쇠로 평가받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Nature Cell Biology에 게재되었다.
대장암과 연관된 세포 역분화, 조절하는 ‘후성유전학적 스위치’
장 상피세포는 손상을 입었을 때 일시적으로 줄기세포 상태로 되돌아가 조직을 재생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 ‘역분화(dedifferentiation)’ 현상은 손상 회복을 위한 생리적 반응이지만, 이 전환이 어떻게 조절되는지는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세포 변화는 대장암 발생에서 줄기세포 상태의 유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사진= Nature Cell Biology (2025), DOI: 10.1038/s41556-024-01580-y]
연구를 이끈 피터 뎀프시 교수는 “장세포는 손상을 받으면 본래의 기능을 잠시 멈추고 줄기세포와 유사한 상태로 전환한 뒤, 손상 부위를 복구하고 다시 기능성 세포로 분화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공동 연구자인 저스틴 브럼보 교수는 “세포가 원래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필요할 때만 줄기세포 상태로 전환되도록 정밀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며 “이러한 조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포 기능이 상실되고, 이는 종양 형성과 같은 병적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연구팀은 H3 히스톤 단백질 내에서 일어나는 ‘H3K36 메틸화(methylation)’가 바로 이 전환 과정을 제어하는 핵심적인 후성유전학적 조절 기전임을 확인했다. 이 메틸화는 세포 정체성을 고정하거나 필요에 따라 재생 모드로 전환하도록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장암부터 재생의학까지… 폭넓은 응용 가능성
이번 발견은 대장암과 염증성 장질환, 그리고 항암치료 후 손상된 장 회복 등 다양한 임상적 상황에 적용 가능성이 있다. 연구팀은 일부 대장암에서 정상적인 장세포가 아니라, 지속적인 재생 상태에 머무는 줄기세포 유사 세포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일반 세포와 다른 유전자 발현 패턴을 보이며, 암세포로의 진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뎀프시 교수는 “H3K36 메틸화를 억제하면 세포는 줄기세포 상태로 전환되는데, 이 상태는 손상 회복에 유리하지만, 동시에 암세포와 유사한 특징을 띠게 된다”며 “특히 염증성 장질환처럼 반복적인 손상이 발생하는 질환에서 이 메커니즘이 암 발생과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연구팀은 이러한 줄기세포 상태가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에 대한 저항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손상 회복을 위해서는 필요한 상태지만, 암세포가 이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경우 치료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줄기세포 상태로 전환된 세포는 항암치료에 더 강한 내성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럼보 교수는 “이러한 재생 상태는 암세포에게는 치료 저항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정상 조직이 항암치료로 손상된 상황에서는 오히려 장 점막을 보호하고 회복을 돕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새로운 치료 타깃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약물 반응 평가, 질병 모델링, 나아가 줄기세포를 활용한 세포 치료와 같은 재생의학 분야까지 폭넓은 응용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브럼보 교수는 “이 메커니즘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 특정 세포 상태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유지하는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다”며 “아직 당장 치료에 바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질병을 이해하고 새로운 치료 전략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
더 많은 정보: Alison R. S. Pashos et al, H3K36 methylation regulates cell plasticity and regeneration in the intestinal epithelium, Nature Cell Biology (2025). DOI: 10.1038/s41556-024-0158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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