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는 비가 자주 내리지 않고 강이나 호수가 드물며, 강가를 제외하면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고 키 작은 풀만 무성한 광활한 평지가 있다. 이런 지역을 ‘스텝(steppe)’이라 부른다. 스텝은 반건조 지대의 대표적인 경관으로, 한대·열대·온대 등 다양한 기후대에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스텝이 없어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지리학에서 중요한 자연지리학(physical geography) 개념 가운데 하나다.
‘스텝’이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평평한 초원’을 뜻한다. 전 세계 스텝의 총면적은 사막 다음으로 넓고, 특히 시베리아 남부에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몽골·만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스텝은 길이가 약 8,000km에 이른다. 북미 로키산맥 동쪽의 대평원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스텝은 대체로 산림과 사막 사이의 건조 경계에 띠 모양으로 분포하며, 강수량이 적고 바람이 거세 나무보다 키 작은 초본 식생이 우세하다. 오늘날에는 관개가 가능한 일부 지역에서 밀·보리·귀리 등 건조에 강한 곡물이 재배되고, 광대한 방목지로도 활용된다.
무한한 시야, 압도적 고립감
스텝에 발을 들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산이나 숲이 없는 지형은 시야를 무한히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 만큼 압도적인 고립감을 준다. 한낮의 강렬한 햇볕 아래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몸을 감싸고, 밤이 되면 급격히 식어 얼음이 맺히는 냉기가 스며든다. 풀만 무성한 단조로운 풍경은 처음엔 밋밋해 보이지만, 계절마다 변하는 풀빛, 바람이 그리는 물결, 동물 떼의 이동이 오히려 그 단순한 배경 위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스텝은 나무가 자라지 못할 만큼 건조하지만, 사막보다는 습도가 있어 풀이 자란다. 기온은 극단적으로 변한다. 위도에 따라 여름 낮에는 45℃까지 치솟기도 하고, 겨울에는 –55℃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몽골이나 미국 네바다의 초원지대에서는 낮 기온이 30℃까지 오르다가 밤에는 얼음이 얼 정도로 떨어지는 등 하루 기온차도 극심하다.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스텝
기후 조건에 따라 스텝은 한대 스텝, 온대 스텝, 열대 스텝으로 구분된다. 한대 스텝은 시베리아와 몽골 북부처럼 겨울이 길고 혹독한 지역에 분포하며, 기온이 영하 수십 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환경에서도 건조한 초원이 이어진다. 온대 스텝은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헝가리 평원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유목과 농업이 공존한 공간이었다. 열대 스텝은 사하라 남부의 사헬 지대처럼 아열대와 사막 사이에 위치하며, 우기와 건기가 극명히 갈린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스텝은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광대한 ‘유라시아 스텝’이다. 이 지역은 과거 유목민들의 이동 통로이자 실크로드가 형성된 길목으로, 동서 문명의 교류를 이끈 배경이 되었다. 유라시아 스텝은 길이만 약 8,000km에 달해 하나의 거대한 초원 지대를 이룬다.
북미에도 스텝 지형이 존재한다. 미국 중부에서 캐나다 서부까지 로키산맥 동쪽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은 ‘대평원(Great Plains)’으로 불린다. 이곳은 옥수수·밀·대두 등 곡물 재배의 중심지로 발전해 ‘세계의 곡창지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오늘날에도 글로벌 식량 공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멕시코 북부까지 이어지는 이 스텝 지대는 북미의 기후·경제·생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지리적 기반이다.

스텝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500mm에 불과하다. 숲이 없어 비가 내리면 곧바로 증발하고, 강풍이 불어닥쳐 토양의 수분도 빠르게 줄어든다. 그 결과 땅에 바짝 붙어 자라는 풀 이외의 식생은 정착하기 어렵다. 스텝에 드물게 나무가 보인다면, 그곳에는 예외 없이 하천이나 지하수 공급원이 존재한다.
이런 환경은 역설적으로 초식동물에게는 최적의 조건을 만든다. 넓고 탁 트인 초원에는 영양과 몽골말, 소, 염소, 낙타가 무리 지어 방목된다.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은 이러한 가축 방목을 기반으로 독특한 유목 문화를 이어왔으며, 중앙아시아와 북미의 스텝에서도 방목과 목축은 오랜 생계 방식으로 자리잡아 왔다.
스텝의 풀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라는 강인한 종들로, 여름철에는 빠르게 성장해 가축의 주요 사료가 되고, 겨울철에는 말라붙은 채로 남아 눈 아래에서도 방목이 가능하다. 계절별로 풀의 밀도와 영양가가 달라 가축과 야생동물의 이동 경로도 이에 맞춰 바뀌며, 이러한 주기적인 이동은 스텝 생태계의 중요한 리듬을 형성한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몽골야생말(프제발스키말, Equus ferus przewalskii)은 무분별한 사냥과 목초지 감소, 가축과의 경쟁으로 서식지를 잃으면서 결국 야생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 종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을 대표하는 상징적 동물이었지만, 인간의 압력 앞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사례가 된 것이다.
멸종 위기에 처하자 국제적으로 보존 노력이 시작됐고, 유럽과 아시아의 동물원에 남아 있던 개체들을 모아 계통을 관리하면서 집단 번식이 이뤄졌다. 몽골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국립공원과 보호구역에 이 말들을 방사해 야생 적응 훈련을 진행했고, 현재는 후스트 국립공원과 타흐린노르 보호구역 등지에서 소규모 무리가 다시 풀을 뜯으며 살아가고 있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한때 이 종을 ‘야생 절멸(Extinct in the Wild)’로 분류했지만, 재도입 사업이 성과를 거두면서 현재는 ‘위기종(Endangered)’으로 등급이 조정됐다. 개체 수는 아직 수천 마리에 불과해 취약한 상태지만, 인간에 의해 한 번은 사라졌던 야생 종이 다시 스텝에 뿌리를 내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스텝이 던지는 시사점
스텝은 단순히 나무가 없는 풀밭이 아니라, 기후와 지형, 생태와 인간 활동이 교차하는 복합적 공간이다. 극단적 기온과 낮은 강수량은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생존의 조건을 엄격히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넓은 방목지와 곡물 재배지로 기능하며, 고대 유목문화와 현대 농업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스텝을 이해하는 일은 자연환경이 인간의 삶과 문명을 어떻게 규정해왔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며, 오늘날 기후 위기를 논의하는 데도 의미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Science Wave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