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우주의 ‘구멍’처럼 보이지만, 회전하는 블랙홀에서는 오히려 에너지를 빼낼 수도 있다. 최근 물리학자들은 실제로는 전혀 회전하지 않는 전자 장치를 이용해 이 현상을 흉내 냈고, 들어온 전파보다 약 6배 강한 신호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회전하는 블랙홀은 ‘거대 에너지 저장고’다
회전하는 블랙홀 주변에서는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블랙홀이 돌면서 주변의 공간 자체를 함께 끌고 도는 것이다. 숟가락으로 꿀을 휘저으면 주변 꿀까지 따라 회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효과가 특히 강한 곳이 사건의 지평선 바로 바깥에 있는 ‘에르고영역’이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면 빛조차 돌아올 수 없지만, 에르고영역에서는 아직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공간이 워낙 강하게 끌려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어떤 물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1969년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는 바로 이곳에서 회전하는 블랙홀의 에너지를 꺼낼 수 있다는 기발한 방법을 제안했다.
물체 하나를 에르고영역으로 보낸 뒤 둘로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한 조각은 블랙홀 안으로 떨어지고, 다른 조각은 밖으로 탈출한다. 특별한 조건이 맞으면 탈출한 조각은 처음 물체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나온다.
에너지가 공짜로 생긴 것은 아니다. 부족한 만큼을 블랙홀의 회전 에너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른바 ‘펜로즈 과정’을 반복하면 이론적으로 매우 빠르게 회전하는 블랙홀에서 전체 질량에너지의 최대 약 29%에 해당하는 회전 에너지를 꺼낼 수 있다. 에너지를 충분히 빼내면 블랙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회전이 느려진다.
비슷한 현상은 물체가 아니라 파동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1971년 소련 물리학자 야코프 젤도비치는 파동을 매우 빠르게 회전하는 물체에 보내면 특정 조건에서 파동이 오히려 더 강해져 돌아올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를 ‘초복사’라고 한다. 파동이 회전하는 물체로부터 에너지를 빼앗아 더 강해지는 현상이다. 이후 실험실에서는 회전하는 원판이나 금속 원통을 이용해 실제로 이 효과가 확인됐다.
돌지 않는 장치가 ‘초고속 회전’을 흉내 냈다
2026년 미국 뉴욕시립대 연구진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이상한 실험을 했다. 이번에는 장치를 아예 돌리지 않았다.
연구진이 만든 것은 전자 부품을 원형으로 늘어놓은 고리였다. 부품들은 책상 위에 고정돼 있어 실제로는 1㎜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각각의 전자 부품 성질을 아주 정확한 시간차를 두고 차례차례 바꿨다. 그러자 변화하는 ‘패턴’만 원을 따라 빠르게 달리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경기장의 관중들이 한 명씩 차례로 일어섰다 앉으면서 거대한 파도가 경기장을 도는 것처럼 보이는 ‘웨이브’를 생각하면 쉽다.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만 파도 모양 자체는 경기장을 빠르게 이동한다.
전자장치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물질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변화의 패턴은 마치 고리 전체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것처럼 전파에 작용했다. 이를 ‘합성 회전’이라고 한다.
이 패턴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물질이나 정보가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연구진이 이 가짜 회전 속도를 충분히 높이자 들어온 전파가 약해지는 대신 더 강해져 나왔다. 측정된 증폭은 7.8데시벨이었다.
데시벨은 단순히 숫자가 두 배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전력으로 환산하면 약 6배에 해당한다. 즉 전파가 장치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약 6배 강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장치가 ‘무한 에너지’를 만든 것은 아니다. 전자 부품의 상태를 계속 바꾸는 데에도 외부 전력이 필요하다. 에너지가 없는 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장치 전체가 공급받은 에너지가 파동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 점은 실제 블랙홀에서도 같다. 블랙홀에서 빠져나온 물체나 파동이 처음보다 많은 에너지를 갖게 된다면 그만큼 블랙홀의 회전 에너지는 줄어든다. 우주의 법칙을 속여 공짜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거대한 에너지 저장고에서 꺼내 쓰는 것이다.
이번 실험의 진짜 의미는 회전하는 블랙홀을 실험실에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다. 우주에서 가장 극단적인 환경에서 나타나는 물리 현상을, 움직이는 부품 하나 없이 작은 전자회로 위에서 재현했다는 데 있다. 수십 년 전 블랙홀을 연구하며 탄생한 이론이 이제 새로운 전파 증폭 기술과 인공 물질 연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생겼다.
성치훈 기자 hello@sciencewave.kr
출처: ScienceABC, “How Do You Extract Energy From A Black Hole Using A Device That Never Sp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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