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과학] 한국인이 사랑하는 밤, 그리고 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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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언스웨이브

밤은 생밤, 삶은 밤, 군밤 어느 것이든 달콤하고 고소한 맛 덕분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을의 대표 견과이다. 영양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돼 과거에는 허약한 어린이의 건강식으로도 쓰였다. 특히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할 때 밤은 귀중한 구황식품이었다.

구황식품은 ‘흉년에 굶주림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대신하는 식품’을 뜻하며, 견과(nut)는 ‘단단한 열매’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견과에는 밤, 도토리, 호두, 은행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예로부터 구황식품으로 활용됐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 견과인 밤.

밤나무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재배된 식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을 비롯해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등 온대 지방 전역에 분포하는 참나무과(Fagaceae) 식물이다. 과거 평양 지역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평양밤나무가 많이 재배되었는데, 열매는 재래종보다 작았지만 달고 속껍질이 잘 벗겨져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생종 밤과 평양밤을 맛보기 어렵게 되었다. 194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밤나무 새순 속에 기생해 생장을 방해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밤나무혹벌이 대유행했기 때문이다.

밤은 탄수화물과 비타민, 무기질이 풍부해 에너지원이자 면역과 대사에 도움이 되는 균형 잡힌 천연 영양식이다.

밤나무를 병들게 한 밤나무혹벌

밤나무혹벌(Dryocosmus kuriphilus)은 1941년 일본에서 처음 확인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59년 이후 전국적으로 번성해 밤나무의 생장을 막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했다. 피해를 입은 새순은 충방이 말라버려 밤이 열리지 않고, 여기에 곰팡이병까지 번져 나무 전체가 말라 죽기도 했다.

중국이 원산인 밤나무혹벌은 길이가 2.5-3mm에 불과한 작은 벌 종류이다. 이 벌의 암컷은 밤나무의 부드러운 조직인 새순에 산란관을 꽂아 길이가 0.2mm 정도인 흰색의 알을 낳는다. 식물의 뿌리와 잎에서는 영양분이 가득한 수액을 새순으로 보내 가지와 잎이 자라고 꽃이 피도록 한다.

혹벌의 알은 부화하여 새순으로 들어오는 영양액을 섭취하면서 길이가 2.5mm에 이르는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 시기를 거쳐 성충이 되어 구멍을 뚫고 탈출하는 사이에 새순의 조직은 크게 손상되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다.

혹벌의 애벌레가 새순 속에 자라면 새순은 정상으로 분화와 생장을 하지 못하고 사진처럼 직경이 2cm가량 되는 혹 조직으로 변한다. 이 혹을 우리말로는 충영(蟲廮) 또는 충방(蟲房)이라 하며, 영어로는 gall이라 한다. 혹벌은 대개 100여 개의 알을 여러 개의 새순에 분산하여 산란한다. 흥미롭게도 밤나무혹벌의 수컷은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이 없다. 그래서 혹벌은 수컷과 수정하지 않고 알을 낳는 단성생식(單性生殖)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천적 활용과 저항성 품종 개발

밤나무혹벌은 알과 애벌레가 충방 속에 숨어 자라기 때문에 살충제로는 제거하기가 어렵다. 이에 곤충학자들은 혹벌의 천적인 중국긴꼬리좀벌, 남색긴꼬리좀벌, 노란꼬리좀벌 등을 야생에서 채집해 밤나무 산지에 방사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우리나라 임업연구소 김철수 연구원이 2003년 <임업시험장 연구보고서>에 발표한 ‘중국긴꼬리좀벌을 이용한 밤나무혹벌의 생물적 방제’ 논문에 따르면, 성충의 크기가 약 2.4mm인 중국긴꼬리좀벌은 직경 0.43mm의 알을 밤나무혹벌이 숨어 있는 새순에 산란한다. 알에서 부화한 유충은 충방 속의 혹벌 알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긴꼬리좀벌이 번식하면 혹벌은 증식하기 어렵다.

긴꼬리좀벌(Torymus sinensis)은 길이가 2.4mm 정도이다. 긴꼬리좀벌의 애벌레는 밤나무혹벌의 알을 잡아먹고 자란다.

밤나무혹벌의 피해가 극심하던 시절은 지금처럼 유전자공학이 발달하기 전이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첫째, 혹벌이 잘 침범하지 못하는 품종을 개발하는 것, 둘째, 긴꼬리좀벌과 같은 천적을 대량으로 인공배양해 밤나무 농장에 살포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천적을 대량 증식해 방사하는 방법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한계가 있었다.

전국의 재래종 밤나무들이 거의 혹벌 피해로 고사하던 시기에도 드물게 피해를 받지 않고 잘 자라는 개체가 있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나무를 선발해 혹벌에 강한 품종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196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저항성 품종이 보급되었고, 이후 내충성이 강한 신품종이 재배되면서 밤나무혹벌의 피해는 크게 줄었다. 다만 60여 년이 지난 최근에는 일부 지방에서 다시 혹벌 피해가 보고되면서 재배 농가들이 긴장하고 있다.

밤나무 꽃과 밤송이

우리나라 밤나무의 암꽃은 보통 세 송이가 함께 피며, 총포라 불리는 조직이 이를 감싼다. 수정이 이루어지면 총포는 가시로 덮인 밤송이가 되어 열매를 보호한다.

밤은 사람뿐 아니라 다람쥐, 쥐, 새, 포유동물의 중요한 먹이가 된다. 밤송이의 단단한 가시는 열매가 완전히 익어 떨어질 때까지 다른 동물로부터 밤을 지켜준다.

밤꽃이 피면 진한 냄새가 풍긴다. 사람에 따라 이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 향기롭게 느끼도 한다.

알밤의 꼭지에는 몇 개의 암술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밤송이의 가시는 암꽃을 둘러싼 총포가 자란 것이다. 완전하게 성숙한 종자를 퍼뜨리도록 진화된 밤나무의 지혜이다.

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 동안 사랑받아온 견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마를 ‘밤고구마’라 부를 정도로 그 맛을 높이 평가해왔다. 오늘날에는 겨울철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던 군밤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밤은 여전히 영양가 높은 천연 간식으로 남아 있다.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어려운 시절 생존을 지켜준 구황식품이자 계절의 풍요를 상징하는 열매로서 밤은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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