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처음 먹은 초콜릿의 달콤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 다양한 초콜릿을 맛보다 보면, 똑같은 ‘초콜릿’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향과 질감, 여운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제품은 과일의 산뜻함이 스치고, 어떤 것은 견과류처럼 고소하다. 오랫동안 이런 차이는 코코아 품종이나 원산지, 카카오 함량 때문에 생긴다고 이해돼 왔다. 하지만 최신 연구는 전혀 다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초콜릿의 깊은 풍미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유전적 특성이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활동하는 미생물의 세계라는 것이다.
영국 노팅엄대학교 데이비드 고파울찬 연구팀은 2025년 Nature Microbiology에 발표한 연구에서 초콜릿 향미를 좌우하는 분자 조성의 대부분이 코코아콩 발효 과정에서 증식하는 야생 효모와 초산균의 대사 활동에 의해 생성된다고 밝혔다.
코코아콩은 수확 직후 과육에 싸인 채로 5~7일간 자연 발효된다. 이 동안 효모는 과육 속 당분을 분해해 에탄올과 방향족 화합물을 만들어내고, 이어 등장한 초산균은 이를 산화해 초산과 에스터 화합물을 형성한다. 이렇게 생산된 수백 종의 휘발성 향기 분자는 로스팅 단계에서 마이야르 반응을 거치며 초콜릿 특유의 복합적인 향미 구조로 재배열된다. 초콜릿 향미는 단일 물질이 아니라 발효 생화학과 열화학 반응이 중첩된 결과다.






연구팀은 32종의 박테리아와 22종의 효모를 분리해 조합 실험을 수행했고, 특정 미생물 군집에 따라 향미 프로파일이 뚜렷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예를 들어 일부 효모 조합은 과일 향을 강화했고, 특정 초산균 조합은 카라멜과 견과류 계열의 향미를 키웠다. 이는 초콜릿 발효가 더 이상 ‘자연에 맡기는 과정’이 아니라 ‘설계 가능한 공정’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와인·치즈·커피 산업에서 발효 미생물의 선택과 조절이 품질을 결정하는 핵심인 것처럼, 초콜릿 산업 역시 미생물 기반의 정밀 발효 기술이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이 연구는 단순히 향을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식품과 미생물 생태학 연구 전반에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미생물 군집을 해석하고 조절하는 기술은 향미 산업뿐 아니라 기능성 식품, 생물 소재, 의약학적 전달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초콜릿은 더 이상 ‘단맛의 사치품’이 아니라, 미생물 생태와 분자생물학, 화학 공정이 교차하는 복합 기술 산업의 결과물이다. 앞으로는 카카오 퍼센트나 산지보다 발효 균주 조합이 초콜릿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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