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안이 불에 덴 듯 고통스럽다. 냉수로 여러 차례 씻어내도 불타는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도 너무 매워서 끝내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매운맛을 줄여주는 소스 같은 것은 없을까.
고추(Capsicum spp.)는 한국인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다. 흔히 토종 식물로 여겨지지만 실제 원산지는 페루와 볼리비아 지역이며, 멕시코에서는 6,000년 전부터 재배해왔다. 자가수분이 잘되어 재배가 쉬운 편이고, 오늘날에는 매운맛, 향, 형태, 색이 다른 수백 종의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완숙한 고추 열매는 건조해 가루(chili powder)로 쓰거나, 고춧가루와 소금·포도주·식용유 등을 섞어 만든 핫소스 등으로 활용된다. 한국인의 발효 조미료인 고추장은 영어로 red chili paste라 불린다.


매운맛의 척도, 스코빌 단위
고추 열매의 매운맛을 내는 성분은 캡사이신과 디하이드로캡사이신으로, 두 성분을 합쳐 캡사이시노이드라 부른다. 무색이지만 물에 잘 녹으며, 품종이나 재배 환경에 따라 함량이 달라진다. 건조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조건에서 자란 고추일수록 매운맛이 강해진다.
매운 정도는 ‘스코빌 척도(Scoville heat unit, SHU)’로 표시한다. 이는 미국 약학자 윌버 스코빌(Wilbur Scoville, 1865~1942)이 1912년에 고안한 것이다. 피망과 파프리카의 SHU는 0으로 사실상 맵지 않다. 반면 가장 매운 품종은 318만 SHU에 달한다. 국내에서 가장 맵다고 알려진 청양고추는 4,000~12,000SHU 범위에 있으며, 덜 매운 고추는 1,500SHU 수준이다. 그러나 같은 품종이라도 기온이 높거나 가물면 척도가 훨씬 올라간다.


매운맛을 억제하는 성분
흥미롭게도 스코빌 척도가 같더라도 실제로는 덜 맵게 느껴지는 고추가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의 향기과학자 데빈 피터슨(Devin Peterson) 교수 연구팀은 수십 종의 고춧가루를 수집해 SHU를 측정하고, 동시에 매운맛을 완화시키는 성분을 탐색했다. 연구 결과 ‘캡시아노사이드(capsianoside)’라는 배당체 성분이 매운맛 억제에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성분은 모든 고추에 들어 있으나 특히 매운맛이 약한 품종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검출된다.
캡시아노사이드는 구조적으로 캡사이신과 유사하지만, 수용성 당(sugar)과 결합된 형태라서 인체의 통각수용체(TRPV1 수용체)에 결합하는 방식이 다르다. 과학자들은 이 점 때문에 캡사이신이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신호를 약화시키거나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매운 성분이 그대로 존재하더라도 ‘통증 신호’가 뇌로 덜 전달되도록 하는 완충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실험에서는 동일한 SHU 값을 지닌 두 품종을 비교했을 때, 캡시아노사이드 함량이 높은 고추는 패널들이 일관되게 덜 맵다고 평가했다. 이는 매운맛 지각이 단순히 화학적 농도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억제·보완 물질의 존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캡시아노사이드의 정확한 작용 경로나 인체 내 대사 과정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현재는 분자 수준에서 TRPV1 수용체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리고 음식 조리·발효 과정에서 성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진행 중이다.
안티 스파이스 소스 나올까
시장이나 식당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도 너무 매워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매운맛을 빠르게 줄여주는 ‘anti-spice 소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입안의 불타는 감각을 진정시키는 소스는 매운맛을 잘 못 견디는 사람들에게 분명 유용할 것이다.
실제로 전통적으로 매운맛을 줄이기 위해 활용해온 식재료와 요리법이 여러 나라에 있다. 대표적으로 유제품은 단백질이 캡사이신 분자와 결합해 매운 자극을 완화한다. 식물성 지방이나 견과류 버터 역시 지용성인 캡사이신을 녹여 매운맛을 부드럽게 만들며, 레몬즙이나 식초 같은 산성 성분은 알칼리성인 캡사이신을 중화한다. 여기에 설탕이나 꿀 같은 단맛을 더하면 매운맛의 강도를 균형 있게 낮출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반영한 음식 문화도 다양하다. 인도와 중동 지역에서는 매운 커리와 함께 요거트 기반의 라타 같은 소스를 곁들이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코코넛밀크를 넣어 매운맛을 부드럽게 한다. 이런 사례들은 매운맛을 직접 없애기보다 자극을 덜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앞으로는 이러한 조합에 더해 고추 속에 존재하는 캡시아노사이드 같은 천연 성분을 활용하면 기능성 ‘anti-spice 소스’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요거트나 코코넛밀크 베이스에 지방, 산, 전분 등을 조화롭게 배합하면 매운 자극을 빠르게 줄이면서도 음식의 맛을 해치지 않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관건은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기호에 맞는 맛과 향을 구현하는 일이다.
결국 ‘anti-spice 소스’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매운맛을 잘 못 먹는 소비자에게 새로운 식문화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다. 한국인의 매운 음식 문화와 식품 연구 역량을 고려할 때, 이런 소스를 국내에서 개발해 세계 시장에 선보이는 것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과제다.
참조 논문: J. Borcherding, E. Tello, and D.G. Peterson. Identification of chili pepper compounds that suppress pungency perception. Journal of Agricultural and Food Chemistry. Vol. 73, May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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