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도 않고 1000회 실험’…AI·로봇, 화학 실험실서 열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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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언스웨이브

  • IBS 인공지능 및 로봇 기반 합성 연구단, 자동 화학 실험 플랫폼 개발
  • 합성 효율성↑, AI용 데이터 확보…국제학술지 네이처 발표

화학 연구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끝에서 이뤄졌다. 연구원들이 시약을 계량하고 조건을 조금씩 달리하며 같은 실험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방대한 시간이 필요하고, 무수한 변수 가운데 극히 일부만 시험할 수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실험을 직접 수행하는 주체가 사람에서 로봇으로 바뀌고, 쏟아지는 데이터를 분석해 의미를 뽑아내는 역할은 인공지능(AI)이 맡으면서 화학 반응을 이해하고 새로운 물질을 발굴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수천 조건을 한눈에 보는 반응 지도

최근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플랫폼은 연구의 혁신을 제안한다. 기초과학연구원(IBS) AI·로봇기반합성연구단은 플랫폼은 하루 약 1000회의 실험을 자동으로 소화한다. 로봇은 온도, 농도, 촉매 등 반응 조건을 수천 가지 조합으로 바꿔가며 실험을 병렬로 수행하고, AI는 그 결과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반응 네트워크 지도’를 그려낸다.

이 지도는 마치 지하철 노선도처럼 출발 물질에서 생성물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경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기존에 단순히 “A+B→C”로만 요약되던 반응이, 사실은 수많은 분기와 우회로를 지닌 복잡한 연결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덕분에 연구자는 원하는 물질로 가는 최적 경로를 선택할 수 있고, 그동안 감춰져 있던 반응 경로도 확인할 수 있다. 몇 년이 걸릴 탐색이 며칠 만에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연구의 속도와 범위는 근본적으로 확장됐다.

기초과학연구원(IBS) AI·로봇기반합성연구단이 개발한 자동 합성 플랫폼의 실험 장면. 로봇이 수천 가지 온도·농도·촉매 조건을 바꿔가며 화학 반응을 동시에 수행하고, AI가 결과를 분석해 ‘반응 네트워크 지도’를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숨겨진 반응 경로를 찾아내고 새로운 화합물도 규명할 수 있다. [사진=기초과학연구원]

이 자료는 한츠슈 피리딘 반응을 로봇·AI 플랫폼으로 다시 분석한 결과다. 위쪽은 여러 갈래로 이어지는 반응 경로를 보여주는데, 파란색은 기존에 알려진 생성물, 빨간색은 새롭게 발견된 물질이다. 아래쪽 3D 그래프는 조건에 따라 특정 물질이 얼마나 잘 만들어지는지를 시각화한 것으로, 빨간 점이 최적 조건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연구진은 숨겨진 반응 경로와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고, 어떤 조건에서 반응이 가장 효과적인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진=기초과학연구원]

숨은 반응 갈래와 미지의 화합물 드러나

연구팀은 이 플랫폼을 활용해 150년 전 보고된 ‘한츠슈 피리딘 합성 반응’을 다시 들여다봤다. 항생제와 항암제 합성에 중요한 이 반응은 오랫동안 단순한 공식으로만 이해돼 왔지만, 이번에는 전체 네트워크로 재구성되며 숨은 경로와 예상치 못한 생성물이 드러났다.

또 이차전지 소재로 활용되는 ‘프러시안 블루 유사체’를 대상으로 수백 조건을 시험해 기존 촉매보다 효율성과 정밀도가 높은 조건을 규명했고, 과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새로운 화합물 네 종까지 찾아냈다. 이는 단순히 속도를 높이는 수준이 아니라, 화학 반응의 이해를 넓히고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바르토슈 그쥐보프스키 단장(오른쪽) 연구팀 [사진=기초과학연구원]

자동화를 넘어선 탐색과 발견

해외에서도 로봇 실험실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IBM은 연구자가 온라인으로 지시하면 로봇이 원격에서 실험을 수행하는 ‘클라우드 랩’을 운영하고 있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은 합성 절차를 디지털화해 로봇이 그대로 실행하는 ‘켐캠’을 개발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절차 자동화와 효율 개선에 집중하는 데 반해, IBS 플랫폼은 수천 조건을 병렬로 실험해 전체 반응망을 지도화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연구단장 바르토슈 그쥐보브스키는 “화학 반응을 직선식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며 “AI와 로봇의 결합은 신약과 신소재 개발을 앞당기고 발견의 폭을 넓히는 핵심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성과는 로봇과 AI가 단순한 보조 장비가 아니라, 과학적 혁신을 주도하는 주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 플랫폼을 실제 신약 후보 물질 탐색이나 차세대 배터리 소재 개발 같은 산업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으며, 한국이 세계 로봇 실험실 혁신 흐름 속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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