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문명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불의 시작은 인류 진화의 시간표 자체를 다시 써야 할 만큼 깊숙한, 약 4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단순한 연대 수정이 아니라, 인간이 언제부터 자연의 불이 아닌 자기 손의 불을 가졌는지를 처음으로 특정한 발견이다.
영국 동부 잉글랜드 서퍽 주 반햄(Barnham, Suffolk) 구석기 유적에서 인류가 스스로 불을 만들어 사용한 가장 오래된 직접 증거가 확인됐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렸으며, 기존 최古 기록으로 알려진 약 5만 년 전 프랑스 북부 네안데르탈인 유적보다 35만 년 앞선 시점이다. 반햄 유적에서는 붉게 변한 점토층, 고온에 의해 파손된 석기, 불꽃을 일으키는 광물인 황철석(pyrite) 조각 두 점이 함께 발견됐다. 황철석 첫 조각은 2017년에 확인됐고, 4년에 걸친 지구화학 분석 결과 연소 온도는 섭씨 700도를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장소에서 불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흔적도 확인됐다. 번개나 산불이 아닌, 사람이 만든 화덕의 특성과 일치하는 패턴이다.

황철석은 반햄 일대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광물이다. 연구진은 당시 사람들이 황철석의 발화 성질을 이해하고, 다른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채집해 점화 도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의 구석기 고고학자 롭 데이비스(Rob Davis)는 고온 흔적과 반복 연소, 황철석의 조합이 불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초기 인류의 불 사용 흔적은 재와 숯이 쉽게 흩어지고, 열에 변한 퇴적층도 침식돼 거의 남지 않는다. 그러나 반햄 유적에서는 불탄 흔적이 고대 연못 퇴적층에 봉인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이 덕분에 화덕의 구조와 반복 사용 패턴까지 비교적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었고, 연구진은 이 화덕이 일시적 흔적이 아니라 생활 공간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국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의 인류 진화 전문가 크리스 스트링어(Chris Stringer)는 반햄의 거주 집단이 초기 네안데르탈인 계통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영국과 스페인(Spain)에서 발견된 동시대 화석의 두개골 구조와 유전 정보는 이 시기 인류의 인지 능력과 기술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불은 추위 극복과 포식자 회피, 음식 조리를 가능하게 했고, 조리는 에너지 흡수 효율을 높여 뇌 발달로 이어졌다.
화덕 주변의 저녁 활동은 계획, 이야기 전달, 사회적 유대 형성의 공간이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반햄 유적은 약 50만~40만 년 전 유럽 전역(Europe)에서 동시에 진행된 이러한 변화 흐름과 맞물린다. 영국박물관 닉 애슈턴(Nick Ashton)은 이번 발견을 40년 연구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로 꼽으며, 인간이 자연의 불에 의존하던 존재에서 필요할 때마다 불을 만들어 쓰는 존재로 전환한 시점을 가장 앞선 증거로 확정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
More information: Rob Davis et al, Earliest evidence of making fire, Nature (2025). DOI: 10.1038/s41586-025-09855-6
Journal information: Nature
Science Wave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