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기술이 본격적으로 연구실을 벗어나 현실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통신, 센싱, 계산 분야에서 초기 상용 시스템이 등장했고, 일부는 이미 클라우드 형태로 외부에 개방됐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반도체처럼 일상 속 기술로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자기술은 우리가 익숙한 0과 1의 디지털 계산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상태가 겹쳐 존재할 수 있는 양자의 성질을 이용한다. 전자가 한 방향으로만 도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방향의 가능성을 갖는 것처럼, 양자컴퓨터의 최소 단위인 큐비트도 0과 1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 이 특성 덕분에 기존 컴퓨터로는 수천 년이 걸릴 계산을 짧은 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다만 이런 능력은 주변의 아주 미세한 진동이나 온도 변화에도 쉽게 깨질 만큼 불안정해, 극저온 환경과 정교한 제어 기술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양자기술은 이론적 잠재력에 비해 실제 활용까지는 여전히 많은 기술적 장벽을 안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 스탠퍼드대, MIT,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연구진이 공동 발표한 논문은 현재 양자 정보 하드웨어 기술이 고전 컴퓨터 산업이 트랜지스터를 막 도입하던 초기 단계와 유사한 위치에 도달했다고 진단했다. 이 논문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연구를 이끈 데이비드 아우샬롬 시카고대 교수는 “기초 물리는 이미 정립됐고, 실제 작동하는 양자 시스템도 존재한다”며 “이제 관건은 수십만, 수백만 큐비트 규모로 확장 가능한 구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고 밝혔다.

6대 핵심 양자 하드웨어 플랫폼 경쟁 구도
논문은 현재 세계적으로 개발이 집중되고 있는 6가지 양자 하드웨어 플랫폼을 비교 분석했다. 초전도 큐비트, 이온 트랩, 스핀 결함, 반도체 양자점, 중성 원자, 광자 기반 큐비트가 그 대상이다.
연구진은 양자컴퓨팅, 시뮬레이션, 네트워크, 센싱 분야에서 각 기술의 성숙도를 ‘기술성숙도 지표(TR L)’로 평가했다. TRL은 1단계 실험실 기초 원리부터 9단계 실제 환경에서의 안정적 운용까지 기술 발전 단계를 수치로 나타낸다. 이 평가 과정에는 ChatGPT와 Gemini 같은 대형 언어 AI도 활용됐다.
평가 결과, 양자컴퓨팅 분야에서는 초전도 큐비트, 양자 시뮬레이션에서는 중성 원자, 양자 네트워크에서는 광자 큐비트, 양자 센싱에서는 스핀 결함 기술이 가장 높은 성숙도를 보였다. 다만 이는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수준의 성과를 의미할 뿐, 산업적으로 의미 있는 성능이 확보됐다는 뜻은 아니다.
MIT 윌리엄 올리버 교수는 “1970년대 반도체 칩도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기술이었지만, 지금의 집적회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했다”며 “오늘날 양자기술의 높은 TRL 역시 종착점이 아니라 긴 확장 과정의 출발선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수백만 큐비트라는 현실적 장벽
현재 양자컴퓨터는 소규모 연산, 단순한 분자 계산, 제한된 최적화 문제 정도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신약 개발, 대규모 물질 시뮬레이션, 암호 해독처럼 산업적 파급력이 큰 응용을 수행하려면 수백만 개 이상의 물리적 큐비트가 필요하다. 동시에 오류율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아져야 한다.
양자 시스템이 대형화될수록 물리적 한계도 함께 드러난다. 대부분의 양자 플랫폼은 큐비트 하나마다 개별 제어선이 필요하다. 큐비트 수가 수십만 개를 넘어가면 배선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는 1960년대 고전 컴퓨터 개발 과정에서 발생했던 ‘숫자의 폭정’ 문제와 매우 유사하다. 전력 공급, 극저온 환경 유지, 자동 보정, 신호 제어 문제까지 더해지면 현재의 양자컴퓨터는 아직 ‘정교한 실험 장치’의 성격이 강하다. 산업용 장비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소재, 공정, 집적 기술 전반에서 대대적인 기술 진화가 필요하다.
연구진은 양자기술 대중화의 가장 큰 열쇠로 소재 과학과 제조 공정을 꼽았다. 현재 양자 소자는 연구실 수준에서 정밀하게 제작되지만, 대량 생산과 장기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기는 어렵다.
반도체 산업처럼 안정적인 파운드리 공정이 구축돼야만 양자소자도 산업 규모로 확장할 수 있다. 균일한 품질의 칩을 대량으로 찍어내고, 장기간 오류 없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기술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이 연구진의 판단이다.
양자기술의 시간표는 길다
논문은 양자기술이 고전 컴퓨팅과 유사한 발전 경로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리소그래피, 트랜지스터 소재처럼 핵심 기술들도 실험실에서 산업 현장으로 이동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연구진은 단기간에 혁신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보다, 장기적인 투자와 협력 구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 성과를 과도하게 독점하거나 기술을 조기에 분절하는 방식은 오히려 발전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논문은 “많은 기술 혁신은 긴 인내의 결과였다”며 “양자기술 역시 기대 시점을 조절하고, 수십 년 단위의 관점에서 발전 경로를 바라봐야 한다”고 정리했다.
손동민 기자/ hello@sciencewave.kr
참조 논문: David D. Awschalom et a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for quantum information hardware, Science (2025). DOI: 10.1126/science.adz8659
자료: Science / University of Chic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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