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과학계에서 의미 없는 논의로 치부돼 왔다. 물리 법칙이 붕괴하는 특이점 너머를 탐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연구진이 제시한 새로운 방법론이 이 난제를 다시 무대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의 유진 림(Eugene Lim)과 퀸메리대학의 케이티 클라우(Katy Clough), 옥스퍼드대의 조수 아우레코엑체아(Josu Aurrekoetxea)는 최근 국제 학술지 Living Reviews in Relativity(2025)에 발표한 논문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제시했다.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을 극한 상황에서 직접 풀 수 없을 때, 초고성능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근사 해를 구하는 수치상대론(numerical relativity)을 적극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아인슈타인 방정식 한계 넘어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은 중력과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지만, 빅뱅 직후처럼 밀도와 온도가 무한대로 치닫는 특이점에서는 해가 무너진다. 전통적으로 우주론자들은 우주가 등방적이고 균질하다고 가정했지만, 초기 우주가 정말 그렇게 단순했는지는 알 수 없다. 림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만 문제를 찾는 격”이라며, 수치상대론이야말로 빛이 닿지 않는 영역까지 탐구할 수 있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수치상대론은 1960~70년대 블랙홀 충돌에서 방출되는 중력파를 예측하기 위해 제안됐으며, LIGO 실험 준비 과정에서 크게 발전했다. 2005년 처음 실현된 뒤로 블랙홀 병합 문제를 푸는 핵심 도구가 됐다. 연구진은 같은 방식이 빅뱅 이전 조건, 인플레이션의 기원, 다중우주 가설 검증 같은 난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코스믹 스트링과 다중우주 충돌
응용 가능성은 더욱 넓다. 이론적으로 예측되는 우주적 ‘흉터’인 코스믹 스트링이 실제로 어떤 중력파를 낼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만약 우리 우주가 다른 우주와 충돌했다면 그 흔적이 하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다. 이런 연구는 다중우주 가설을 검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우주가 빅뱅 이전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반복적으로 붕괴와 반동을 거듭하는 바운스 우주(cyclic universe) 시나리오도 제안돼 있다. 이는 여전히 가설 단계지만, 수치상대론으로 접근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림은 “강한 중력이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대칭에 기대어 풀 수 없지만, 이제는 여러 연구 그룹이 이 문제에 뛰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슈퍼컴퓨터와 우주 탐구의 결합
수치상대론 시뮬레이션은 방대한 연산을 필요로 해 슈퍼컴퓨터 없이는 수행이 어렵다. 시공간 격자의 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하고 중력파 전파나 특이점 주변의 극한 조건을 모의실험하려면 수십만 개의 연산 단위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슈퍼컴퓨터의 성능이 향상될수록 초기 우주와 강한 중력 영역에 대한 탐구가 한층 정밀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단순히 계산 속도가 빨라지는 차원을 넘어, 지금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매개변수 공간과 복잡한 초기 조건까지 시뮬레이션 범위가 넓어짐을 뜻한다.
또한 이번 논문은 우주론 연구자와 수치상대론 연구자 간의 장벽을 낮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슈퍼컴퓨터 활용 환경이 마련되면 두 집단이 같은 데이터와 모델을 공유하며 협력할 수 있고, 이는 빅뱅 이전 우주·다중우주 시나리오·코스믹 스트링 검증 등 난제를 풀어내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된다.
림은 “우주론자가 풀 수 없던 문제에 수치상대론을 적용할 수 있고, 수치상대론 연구자도 우주론의 난제를 탐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며 향후 공동 연구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
참고 논: Josu C. Aurrekoetxea et al, Cosmology using numerical relativity, Living Reviews in Relativity (2025). DOI: 10.1007/s41114-025-00058-z
Science Wave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