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이 인류 생존에 핵심적인 미생물들을 장기 보존하기 위한 ‘미생물 종말 저장고(Microbiota Vault)’ 구축에 나섰다. 백업 대상은 다름 아닌 사람의 대변이다. 장내 미생물의 급속한 감소와 생태계 붕괴에 대비하기 위해, 국제 연구진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대변 샘플을 극저온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다.
장내 미생물, 굳이 보존하는 이유
장내 미생물군은 면역세포의 조절, 에너지 대사, 비타민 합성, 그리고 세로토닌 등 신경전달물질의 생산에까지 관여하는 생물학적 핵심 요소다. 그러나 항생제 남용, 도시화, 식단 변화, 기후위기 등으로 인해 인간과 환경의 미생물 생태계가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미생물 다양성의 손실은 알레르기, 자가면역
질환, 대사장애 등의 만성질환 급증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는 단순한 건강 문제를 넘어 농업, 환경 회복력, 생물학적 복원 능력 전반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인식 속에서 시작된 ‘마이크로바이오타 볼트(Microbiota Vault)’ 프로젝트는 미생물군의 유전적·기능적 다양성을 백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곧, 미래에 의료적 응용, 생태계 복원, 과학 연구에 활용 가능한 미생물 자산을 안전하게 남겨두겠다는 전략이다.

[사진=Microbiota Vault Initiative]
1,204점 이미 수집…2029년까지 1만점 목표
해당 프로젝트는 2018년 시작됐으며, 현재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의 영하 80도 냉동고에는 총 1,204점의 인간 대변 샘플과 190점의 발효식품 샘플이 보관돼 있다. 이 샘플들은 2018년부터 7년에 걸쳐 브라질, 에티오피아, 라오스, 가나, 태국, 베냉 등 다양한 국가에서 수집됐으며, 각국의 윤리·보건 규제를 준수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운반됐다. 샘플은 브라질, 에티오피아, 라오스, 가나, 태국, 베냉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수집됐으며, 각기 다른 식습관과 생활환경을 반영한 미생물 구성을 담고 있다.
2025년 6월 발표된 논평에 따르면, 연구진은 프로젝트가 현재 ‘증식 단계(growth phase)’에 진입했으며, 2029년까지 총 1만 점의 샘플 확보를 추진 중이다. 이들은 향후 야생 동물, 토양, 극지방 등 다양한 생태계로 확장 수집 범위를 넓혀갈 계획이다.
복원 가능한가? 과학이 풀어야 할 숙제
현재로서는 냉동된 미생물을 다시 해동해 인간의 장이나 생태계에 정착시키는 복원 기술은 개발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생물은 환경 조건에 민감하고, 상호작용하는 군집 구조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단순한 재도입만으로는 이전의 기능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미생물군이 안정적으로 재정착되기 위해서는 복잡한 생태적 균형과 숙주 반응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바이오타 볼트의 공동 설립자인 마틴 블레이저 박사(미국 러트거스대학교)는 “100년 뒤, 이 미생물들이 인류를 구하는 마지막 자원이 될 수 있다”며, 현재의 과학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미래를 대비한 보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기술적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은 물리적으로 안정적인 영구 저장고 건립을 병행하고 있다. 캐나다, 스위스 등 저온 유지가 가능한 한랭지역이 후보지로 검토되고 있으며, 이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처럼 전 지구적 재난 이후 복원을 위한 과학적 안전망 역할을 목표로 한다.
미래 의료 위기, 생태 복원을 위한 과학적 책무
이미 일부 전통 사회에서는 특정 장내 미생물 종이 사라지면서 이를 복원하거나 연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미생물군이 한 번 붕괴되면 단일 치료제나 특정 균주로는 회복이 어렵고, 생태계 전체의 균형에 장기적인 손상을 남긴다. 특히 유년기 동안의 미생물 노출이 부족할 경우 면역 체계가 충분히 훈련되지 않아 알레르기나 자가면역 질환에 더 취약해진다는 연구도 다수 존재한다.
이처럼 미생물군의 상실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 인류 전체의 생물학적 복원 능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마이크로바이오타 볼트’ 프로젝트는 단순한 생물학적 수집을 넘어, 미래 의료와 환경 위기를 대비한 과학적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현재까지 확보된 샘플만 해도 브라질, 라오스, 에티오피아 등 다양한 식문화와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있으며, 향후 1만 점의 샘플은 인류가 보존할 수 있는 미생물 다양성의 집대성이 될 전망이다.
연구진은 “미생물 보존은 단지 현재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과학적 의무”라며, 이 저장고가 차세대 치료법 개발과 생태 복원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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