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위폐기물 처분용기, 국내 모델로 170만 년 안전성 검증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수백만 년 동안 안전하게 가둘 수 있는 처분용기의 장기 내구성이 국내 기술로 과학적으로 검증됐다. 해외 모델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의 지질환경을 직접 반영한 평가 체계를 통해 처분용기의 예상 수명이 최소 170만 년에 이른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9일, 지하 심부 처분 환경에서 고준위폐기물 처분용기의 부식 거동을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는 한국형 다물리 통합 부식 모델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고준위폐기물은 사용후핵연료처럼 방사능이 수십만 년 이상 지속되는 폐기물로, 처분용기는 이 기간 동안 외부 환경으로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지 않도록 차단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스웨덴·캐나다 등 해외 모델을 활용해 안전성을 평가해왔지만, 이들 모델은 단순화된 1차원 단일물리 방식으로 한국의 지질 조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 개발된 모델은 지하수의 화학 조성과 유동 특성, 온도 변화, 전기화학 반응을 동시에 고려하는 2차원 열·수리·화학·전기화학 통합 구조다. 연구팀은 극저농도 산소 환경을 모사한 실내 부식시험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운영하는 지하처분연구시설(KURT)에서 10년 이상 축적된 장기 현장 부식 실험 데이터를 함께 비교해 예측값의 신뢰도를 검증했다. 그 결과, 기존 해외 모델이 처분장 내 산소에 의한 부식 환경이 100년 이상 지속된다고 과대 평가한 것과 달리, 한국형 모델은 약 2.3년이면 산소 조건이 종료된다고 예측했다. 이 수치는 스위스 몽테리(Mont Terri) 지하연구시설에서 관측된 0.5~1.5년 범위와 거의 일치한다.

이 모델을 적용해 현재 개발 중인 한국형 처분용기의 수명을 평가한 결과,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170만 년 이상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수년 동안의 최대 부식 깊이 역시 약 9.3마이크로미터 수준으로 분석됐다. 이는 스웨덴과 캐나다 등 기존 선진국 처분용기 성능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다. 방사성 핵종의 독성이 자연 붕괴로 충분히 감소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처분용기의 구조적 수명이 훨씬 길다는 점에서, 장기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처분 안전성 확보 핵심기술개발사업 지원으로 수행됐으며, 연구 결과는 재료 분야 국제 학술지인 npj Materials Degradation 등에 총 13편의 논문으로 게재됐다. 연구팀은 향후 3차원 모델 확장과 미생물 반응 요인까지 반영해 예측 정확도를 더욱 높일 계획이다. 앞으로 태백시에 건설 예정인 지하연구시설(URL)을 활용한 공학적 방벽 시스템 검증과 처분용기 설계에도 이 모델이 적용될 예정이다.

권장순 처분성능실증연구부장은 이번 성과에 대해 국내 지질 조건을 반영한 독자적 평가 체계를 확보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며,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한국형 처분 기술의 신뢰성과 경쟁력을 입증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지윤 기자/ hello@sciencewave.kr